본문 바로가기
문화와 생활

장욱진 전시회에서

by 창밖의 남자 2021. 2. 26.

봄은 왔건만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겨울처럼 스산하다
혼란스러운 오늘 이 시대에
장욱진의 맑고 순수한 그림은 큰 위안으로 다가온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의 작품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작았고, 담백하고 단순했다
첫눈에 강하게 다가오는 그림은 아니었다

동산, 1978

하지만 전시장에서 마음이 편안했다.
동산에는 믿음직한 나무가 서 있고,
시골집 마당에는 개와 소, 나무 위엔 새가 있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순진무구한 사람들과 그들을 닮은 동물과 부드러운 자연이 있는 풍경이다.
정자가 있는 한옥,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오두막,
평상에서 정담을 나누는 풍경은
아련한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

자화상 1951 고향인 충남 연기군의 논밭길을 서양식 연미복 차림으로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수작으로 꼽히는 자화상 가운데 하나다


영국의 찰리 채플린이 말한 것처럼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일까?

자화상 속의 화가는,
우스꽝스럽게 연기했던 채플린 처럼
연미복 신사의 몰골과 몸짓을 하고 있지만,
우울하고 불안한 낯빛으로 그저 망연자실
창백한 얼굴로 앞을 바라볼 뿐이다

나는 심플한 것을 좋아한다던 그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쉽다 그리고
따뜻하다

가로수, 1978

일부러 난해하게 이미지를 꼬지 않고
가족, 동물, 자연의
소박한 아름다움을 담았기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원근법과 비례를 무시하고 단순하게 담아낸 그림들은
동화 같은 순수함을 전하면서
“괜찮아, 조금은 쉬어가도 돼” 라며
내 어깨를 두드려주는 듯하다

장욱진은
1917년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나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유영국 등과 함께 2세대 서양화가에 속하는
우리나라 근 ·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의 거장 중 한 명이다

양정고보 4학년 때인 1938년
조선일보 주최 ‘전조선학생 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았으며
1939년 동경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대)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6.25 전쟁 이후
서울대 미대 교수(1954-1960)로 근무했지만
6년 만에 작품 창작을 위해 그만두고
자연과 더불어 살며
동화적이고 심플한 선 표현과 독창적인 색채를
선보였다
1990년 12월 27일 74세로 사망했다

장욱진의 작품들은 대부분 작다
이에 대해 그는 확실한 생각을 갖고 있다
.... 회화에 있어서의
회화성은 30호 이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러냐 하면
규모가 커지면 그림이 싱거워지고
화면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한 면을 지배하지 못하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내게 어려운 일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세대> 1974년 6월호에서

畵家
화가를 높여 이르는 말이 화백(畵伯)이다
작품과 오랜 화업에 대한 존경의 의미가 있다
화가로서는 영예로운 호칭이다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낸
장욱진은
화백이나 교수보다 화가라는 말을 좋아했다
집 가(家) 자가 들어간다는 이유에서란다

그는
가족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평생 집과 가족을 그렸다
화백이라는 존칭보다 화가를 자처한 것은
그의 소박한 삶, 작품세계와도 통한다

얼굴, 1957

어디서 본 듯한 작품,
20세기 초 스위스 거장 파울 클레의
기하학적 인물화와 비슷해 주목을 받았다

밤과 노인, 1990

1990년 타계 직전 그린 <밤과 노인>은
첫머리의 자화상과 절묘한 조응을 이루는
마지막 작품이다

밤하늘에 반달과 같이 떠 있는 노인네와
그 아래 지상의 산길을 머뭇거리듯 걸어가는
아이의 대비되는 모습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작가의 원숙하고 깊은 시선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현대화랑은
1978년 ‘장욱진 도화전’을 시작으로
1979년 ‘장욱진 화집 발간 기념전’,
1999년 ‘장욱진의 색깔 있는 종이 그림’,
2001년 장욱진 10주기 회고전
‘해와 달·나무와 장욱진’,
2004년 이달의 문화인물 ‘장욱진’,
2011년 ‘장욱진 20주기 기념전’ 등의
전시를 통해
장욱진과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장욱진의 30주기를 기념하여
이번에 무료로 개최한
《집, 가족, 자연 그리고 장욱진》은
전시회 제목처럼
장욱진 작품의 주요 소재이자 주제인
집, 가족, 자연이라는 모티프에 주목한 전시다

이번 전시에는
초기작부터 말년의 작품까지,
그림 곳곳에 따로 또 같이 등장하는
집 가족 자연의 세 요소에는
일제 식민지, 한국전쟁, 산업화 등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한 예술가의 시대정신이 포착된다

사람의 몸이란 이 세상에서 다 쓰고 가야 한다 나는 내 몸과 마음을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려서 다 써버릴 작정이다
/ 강가의 아틀리에

그는
자신이 말한대로 평생을 작품과 같이했다.

'문화와 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절에 들어가면  (1) 2021.03.12
백화점을 가다  (1) 2021.03.09
우리시대의 일그러진 초상들  (3) 2021.02.07
0.05mm 펜으로  (2) 2021.01.31
붓으로 먹으로 그린다  (2) 2021.01.3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