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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생활

0.05mm 펜으로

by 창밖의 남자 2021. 1. 31.

 

우리 건축물을 통해
세계 모든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 無我
무아의 아름다움을 소개하고 싶은 것이
펜화를 그리는 가장 큰 목적이라고
생전에
김영택 화백은 말했다

0.03mm의 가는 펜으로 그리는
그의 그림은
펜화 한 장을 그릴 때마다
50만 번에서 80만 번의 선을 긋는다
1mm 안에 5번의 선을 그을 만큼
아주 세밀한 그림이다

서양인들의 정확한 원근법이
먼 곳은 작게, 가까운 곳은 크게 그리는
나는 《본다》라는
적극적 의미의 인간 중심의 시각이라면,

김영택 원근법은
내게 《보인다》라는
대상 중심의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지난 2006년 10월 학고재갤러리 전시회 때의​

■ 조용헌(동양학자, 칼럼니스트)의 글이다

펜(pen)은 서양을 대표하는 필기구이고,
붓(筆)은 동양을 대표하는 필기구이다.
펜은 처음에 갈대나 거위깃털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갈대나 거위깃털의
뾰쪽하고 딱딱한 성질을 이용하였다

그 재료가 쇠로 바뀌어서
만년필과 같은 철필(鐵筆)이 등장하였고
연필(鉛筆)도 등장하게 된 것이다

동양의 붓은
동식물의 털(毛)을 주재료로 이용하였다

펜화를 그리는
김영택 선생의 평소 주장에 의하면
붓과 펜은
동서양 문명의 전개양상을 다르게 만들었다고
한다.

펜은
뾰쪽하고 딱딱해서 가늘고 길게 그을 수 있다
바로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펜은 정밀한 건축이나 기계의 설계도면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붓은
부드럽고 뭉특해서
정밀한 설계도면을 그릴 수 없다.
정밀한 설계도면을 그릴 수 있느냐, 없느냐는
엄청난 차이를 유발한다

설계도면이 남아 있으면
후세 사람이
그 도면만을 보고서도 복제가 가능하다.
그 건물을 만들었던 장인이 죽더라도,
도면만 남아 있으면
후세 사람이 그대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면이 남아 있지 않으면
그 기술을 계승받은 제자가 남아 있어야 하고,
만약 전승자가 대를 잇지 못하면
그 기술은
실전(失傳)되고 만다

조선은 설계도가 없었다.
물론 대략적인 그림은 있었지만,
정면, 측면, 평면도와 같은 정밀한 설계도는
남기지 못하였다.
붓과 설계도는 궁합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붓은
서예나 산수화의 경우처럼
감정을 전달하는 데에 장점이 있다

 

펜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김영택 화백.
대략 50만 번의 손질이 간다는
그의 《 펜화 》를 보고 있노라면
펜이 지닌 정밀성과 그림이 지니는 깊이가
모두 느껴진다.

정밀성과 깊이가 합해지면
어떤 시너지 효과가 나오는가.
그것은 품격이다.

선생의 펜화는
동양의 선비들이 추구하던 그윽한 품격을
보여준다.

그가 주로 다루는 주제는 전통 문화재이다.
미황사 대웅전, 서울의 숙정문 등등의 그림은
펜화가 아니면 잡아낼 수 없는 그 어떤
그윽함을 보여주고 있다

펜은 비록 서양에서 시작하였지만,
한국에 들어와서 한국 전통문화가 지닌 영기(靈氣)를 표현하는 데에 사용될 줄은
그 누가 알았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선생은 새로운 문파를 개척한 장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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