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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소쇄원에 가보니

by 창밖의 남자 2021. 2. 15.

전남 담양에 있는 소쇄원을 갔다
푸른 대나무숲이 가득한 그곳에 들어가기 전
주차장에 있는 안내판을 읽어보았다
.....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원림으로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풍기는
아름다움이 있다

양산보가 조성한 것으로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를 당하여 죽게되자
출세에 뜻을 버리고
이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소쇄원이라 한 것은
양산보의 호인 소쇄옹에서 비롯되었으며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 담겨있다

오곡문 담장 밑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물은 폭포가 되어 연못에 떨어지고,
계곡 가까이에는
제월당과 광풍각이 들어서 있다

이곳은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토론하고 창작활동을 벌인
선비정신의 산실이기도 하다

지금의 소쇄원은
양산보의 5대손 양택지에 의해 보수된 모습이다

소쇄원은
누구나 알다시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조선시대의 정원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집 안팎의 조경을 뜻하는 단어로 쓰고 있는
<정원>은 일본식 단어이며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동산의 뜰의 의미로
<園林 원림>을 사용했기에
정원이 아닌 원림으로 써야한다고 말한다

소쇄원은
크게 담장 안의 내원과 담장 밖의 외원으로
구분하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쇄원은 내원을 말한다

초가로 지어 마치 원두막처럼 보이는 대봉대
待鳳臺
상서롭고 고귀한 새 봉황을 기다리는 곳으로
그 곁에는
봉황이 와서 머문다는 벽오동나무도 있었으나
지금은 고목이 되어 없어졌다

주인장 양산보는 이곳에서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사촌 김윤제,
하서 김인후, 제봉 고경명, 송강 정철과 더불어
정치와 학문, 사상 등을 논하였기에
대봉대는 그야 말로
조선중기 호남 사림문학의 교류처였다

유난히 볕이 바르다는 담장 애양단

겨울에 눈이 내리면
가장 빨리 녹는 따뜻한 곳이라는 애양단

하서 김인후가 지은
「소쇄원사팔영 瀟灑園四八詠」에서
양단동오(陽壇冬午) 라는 시제를 따서
송시열이 애양단이라 이름을 짓고 썼다고 한다

오곡문 五曲門

애양단을 지나면 오곡문을 만난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돌리지 않기 위해
담 밑으로 구멍을 만들었다
그 곳을 통해 흘러든 물길이
암반으로 이뤄진 계곡을
갈지(之)자 모양으로 다섯 번을 돌아
흘러 내려간다는 뜻에서 얻어진 이름이다

오곡문을 지나면 북쪽 담에
瀟灑處士 梁公之廬 소쇄처사 양공지려
(소쇄원 처사 양산보의 오두막집)이라
흰색 바탕에 검은색으로 쓴 글씨를 만난다.

소쇄처사 양공지려 瀟灑處士 梁公之廬 매화를 심었다는 매대 위의 담장으로 송시열의 글씨가 박혀 있다

霽月堂
제월당을 만난다
소쇄원 주인이 학문에 몰두했던 공간으로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을 담고있다
1~2명이 겨우 기거할 수 있을 정도로 작지만
대청마루에서 풍광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올라앉으면 가슴이 탁 뜨일 정도로 시원하다

제월당 마루에는
하서 김인후가 지은
사십팔영시(四十八詠詩)를 담은 편액이
걸려있다

河西
하서 김인후는
소쇄원 내외의 풍경, 계곡과 바람, 새, 풀꽃과
벌레까지 소재로 삼아 48수를 지었다

제월당

光風閣
계곡 옆에 자리한 광풍각은
'비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란 뜻을
담고 있으며
소쇄원을 찾는 이들의 사랑방 역할을 한다

광풍각

이렇게 천천히 걸어서 한 바퀴를 돌고나면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선비의 원림
소쇄원 보기는 불과 10여분 만에 끝이 난다

아니
이게 다야?
이천원이나 되는 입장료도 내고 들어왔건만
허전하다 못해
무언가 속았다는 생각도 든다

입장료 생각도 나고
그냥 나가기에는 너무 섭섭하여
이것저것 따져보며 다시 한 번 돌아본다

瀟灑園은 소쇄원이라고 읽어본다
맑을 소 瀟 / 뿌릴 쇄 灑
그렇게 쉽게 읽을 수 있는 한자는 아니다
못 읽어도 그럴 수 있겠다고 여기며
뜻을 살펴보니 맑고 깨끗하다는 의미란다

대다수 조선의 선비들이 그렇듯이
자신이 창작하기 보다는
중국의 시인과 관료들을 흉내낸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양산보가 스승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아
벼슬길의 무상함을 깨닫고 고향에 은둔했다는
그 때의 나이가
17살이다

공자님도
십오 세는 학문에 뜻을 둔다고 지학 志學
삼십 세가 되면
비로소 뜻이 확고하게 선다고 이립 而立이라
했거늘

양산보가 아무리 성숙했다고 해도
어른이 되어 관을 쓰는 20세 약관弱冠 도 아닌
감수성 예민한 10대 후반에

존경하는 스승이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
이 세상을 바라보며
10대의 청년이
어떠한 생각을 했을지는 과히 상상이 간다
옳고 그름을 떠나
내면적으로 승화시킬 나이는 분명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양산보의 호가 소쇄공이었기에
집 이름을 소쇄원이라 지었다고 하는데
주인장은 어찌하여 자신의 호를
소쇄공 瀟灑公이라 했을까

당나라 시인 이백이 지은 시를 찾아보니
남헌송(南軒松) 의 구절 중에

淸風無閒時 (청풍무한시)
맑은 바람 쉼 없어
瀟灑終日夕 (소쇄종일석)
밤이나 낮이나 늘 상큼하다네

이 구절에 《소쇄》 라는 용어가 나온다

풍수설에 의하면
소쇄원이 자리잡은 터의 뒷산은
鳳巢形
봉황이 둥지를 튼 형국이라고 한다

그래서
소쇄원에는
봉황이 둥지를 트는 오동나무와
봉황이 먹고 산다는 대나무를 많이 심었다
또한
정자를 지어놓고
봉황을 기다리는 臺
대봉대라 이름지었다

조선 중기 가사 문학의 중심지였던
이곳 대봉대에 모인 선비들의 면면을 보면,

면앙정 송순은 양산보의 10년차 외사촌형이고
하서 김인후는 양산보와 사돈 간이다
또한 환벽당 주인으로서
송강 정철과 서하당 김성원의 스승이었던
사촌 김윤제는 양산보의 두살 위 처남이다

사촌 김윤제는
외손녀와 정철을 혼인시키고
그가 27세에 관직에 나아갈 때까지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제월당과 광풍각에는 석천 임억령, 고봉 기대승, 제봉 고경명 등의 글을 담은 편액이 가득하다

10대 나이에 세상의 쓴 맛을 직접 목격한
양산보

뼈 속 깊이 성리학을 따르려는 선비로서
조선의 사림들이 최고의 성인으로 떠받들던
주자의 그림자를
멀리 발뒤꿈치에서라도 따라가려 했던
그런 간절한 몸부림을 치다가
폭풍의 십대를 지나고 서른 나이에 접어들어서
여기 소쇄원을 지었는지도 모르겠다

명필로 유명한 송나라의 시인 산곡 황정견은
성리학자 주돈이(周敦頤)의 사람됨을 평하여

용릉 땅에 살던 선생은 인품이 매우 높았네
그의 마음이 쇄락하여
마치 비갠 뒤의 바람과 달 같았네
흉회쇄락여광풍제월 胸懷灑落如光風霽月

이라고 하였는데
광풍제월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고보니까
광풍제월 이라는 문구는
소쇄원 만이 아니라 곳곳에서 볼 수있다

전서로 쓴 미수 허목의 광풍제월
천옹泉翁 이재 李縡 도봉산 계곡에서

안동 하회마을에 가면
서애 유성룡이 지은 옥연정사 대청마루에도
광풍제월 액자가 걸려있고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도 애송한 글귀다

光風霽月
광풍제월은 맑게 갠 하늘에 거침없는 바람이며
구름 한 점 없는 밤 하늘의 밝은 달을 뜻하는 선비의 도리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그의 두 아들에게 내려주는 훈계
〈우시이자가계 又示二子家誡〉에
광풍제월의 뜻이 잘 나타나있다

士大夫心事,
사대부의 마음가짐은
當與光風霽月,
당연히 광풍제월과 같아
無纖毫恥曖.
털끝만큼도 가려진 곳이 없어야 한다.
凡愧天怍人之事,
무릇 하늘에 부끄럽고 사람에 떳떳치 못한 일은
截然不犯.
단호히 끊어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自然心廣體胖,
절로 마음이 넓어지고 몸이 윤택해져
有浩然之氣.
호연지기가 일어날 것이다
若於尺布銖貨,
만약 한 자의 베나 몇 푼 재물에 팔려
瞥有負心之事,
어쩌다 마음을 져버리는 일이 있게 된다면
卽是氣朒敗.
그 즉시 이 기운은 위축되어 무너지고 만다.
此人鬼關頭,
이것은 사람과 귀신을 가르는 관건이다.
汝等切戒之.
너희들은 깊이 경계하도록 해라.

오곡문이 있는 곳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왜 굳이 힘들게
물이 내려오는 개울 위에다 담장을 쳤을까?
멋을 내
도둑을 막는 것도 아니요
내 땅을 표시하는 것도 아닌데
풍수설에 따르면
북동쪽의 개울가에서 불어오는 거센 골바람은
黃泉煞이라고 해서
집터의 좌향을 잡을 때에
반드시 물을 피하여야 한다는 방위
황천살이기에
애써 계곡 위로 돌담을 치고
나쁜 기운인 골바람을 막은 것이라고 풀이한다

요즘에는
풍수를 미신이라 치부하며
풍수를 보는 것을 풍수쟁라 하며 무시하지만
조선의 선비들은
겉으로는 성리학자이지만
속으로는 뛰어난 풍수학 대가들이었다

五曲
다섯 번을 돌아
흘러 내려간다는 뜻에서 붙였다고 하지만
오곡은
무이구곡의 오곡을 말한다
주자가 공부했던 무이정사가 있던 곳이 무이구곡 중 오곡이었다

구곡 중 가장 중심 되는 곳이니
이 오곡문은
조선 선비들이 성리학의 성인으로 추앙하는
주자를 흉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
지나친 얘기일까?

송나라 주희는
자신이 살던 무이산 계곡에
구곡을 정하고 무이구곡가를 지었는데

이를 따라서
퇴계 이황의 퇴계구곡도 있고
율곡 이이의 고산구곡도 있으며
우암 송시열의 화양구곡도 있는게
우리의 조선이었다

계곡물을 건너면 보이는 화단이 매대
梅臺
제월당 좌우로 매화가 심어져 매대라 불렸다
그러나 그것은 옛 이름 뿐이다
매화가 없다

왜?
지금이라도 홍매 백매 청매를 심으면 될 터인데
매대라 불리는 화단이 텅 비어있을 뿐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떤 깊은 뜻이 있기에 저렇게 방치를 할까?

기록에 나타난
소쇄원의 조경식물을 보면
소나무 ·단풍나무 ·버드나무 ·참등나무 ·대나무
매화나무 ·복사나무 ·살구나무 ·벽오동나무
배롱나무 ·회화나무 ·치자나무 ·사계화나무
국화 ·파초 ·연꽃 ·철쭉 ·동백 ·난 ·측백나무 등
갖가지 온갖 종류의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당시에 심은 나무들 가운데
소나무 · 측백나무 · 배롱나무 몇 그루가
남아 있을 뿐이다

당나라 때 이덕유 라는 사람이 남긴
平泉山居戒子孫記
「평천산거계자손기」 에서,

후대에 이 평천을 파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며
나무 한그루와 돌 하나라도
남에게 주는 자는 훌륭한 자제가 아니다

라며 평천장平泉莊을 보존할 것을
자손들에게 신신당부하였다고 하는데
아마
양산보도 거기에서 영향을 받은 듯 하다

양산보는 죽으면서,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것이며,
후손 어느 한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

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양산보의 후손들은
조상님의 유언을 철저하게 따르고 지켜서
오늘의 소쇄원이 있다

제주 양씨 후손들이 굳건하게 지켜온
소쇄원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원림답게
매대에는 매화가 가득하고
마당과 뜰에는 좀 더 많은 나무들이 가득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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