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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흥화문

by 창밖의 남자 2021. 2. 10.

 

옛 지명에 《야주개》라 불린 동네가 있다
경희궁은
일명 《야주개 대궐 夜照峴 大闕》로 불렸는데,

그것은
정문인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명필이었고,
글씨의 광채가 밤에도 훤히 비추었다고 해서
이 일대를 야주개라고 부른데서 유래한다
지금의 새문안교회와 구세군회관 주변이
바로 거기다

興化門
흥화문
경희궁의 정문이다
남쪽을 향한 경복궁의 광화문과는 달리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원래 경희궁에는
동문인 흥화문 외에
흥화문 왼쪽에 흥원문(興元門),
오른쪽에 개양문(開陽門),
서쪽에 숭의문(崇義門),
북쪽에 무덕문(武德門)이 있었다

광해군이 경희궁을 창건할 때
궁성의 동쪽에 동향으로 배치하였다
또한
경복궁 광화문 창덕궁 돈화문 창경궁 홍화문 등
궁궐 정문이 2층으로 지어진 것과 달리
흥화문은 1층으로 지어졌다

경희궁?
경희대학교와는 다르기는 한데
듣기도 한 듯 처음 들어보는 것 같기도 한
우리에게는 아직도
이름조차 생소한 이름의 궁궐이기는 하다

서울
조선의 도읍지 한성에는
왕이 거처하는 궁궐이 여럿이 있었다
이름하여 서울의 5대 궁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과 더불어
경희궁이 바로 거기에 포항된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법궁인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 궁궐이기에
東闕 동궐이라 하였는데
경희궁은
서쪽에 있어
西闕 서궐이라고 불렸다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사저가 있던 곳인데
광해군이
인왕산 아래에 새 궁궐인 인경궁을 짓다가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풍수설을 믿고
왕기를 누르기 위해 그의 집을 빼앗아
1617년 경덕궁을 건립하였다

영조는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정원군 元宗의 시호인 敬德과 음이 같다고
경희궁으로 고쳤다

慶熙宮
경희궁은
숙종과 경종이 태어난 곳이며
숙종 · 영조 · 순조 그리고
인헌왕후 · 인선왕후 · 인경왕후 · 선의왕후가
승하했으며
경종 · 정조 · 헌종이 즉위한 곳이다

이런 사실이 상징하듯
경희궁은 조선 후기 정치사의 중심무대로서
지금 서울에 남아 있는 어느 궁궐에도
뒤지지 않는
비중과 중요성을 간직한 궁궐이었다

그러나 120여 채의 전각이 즐비했던
경희궁은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전각이 철거되고,
일본인들의 학교로 사용하면서
궁궐의 자취를 잃었다

1907년 궁의 서편에 통감부 중학이 들어섰고,
1910년 궁이 국유로 편입되어
1915년 경성중학교가 궁터에 설립되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서울중고등학교가 되었다

1980년 강남개발계획에 따라
도심부의 명문고교들이 강남으로 이전하면서
서울고등학교도 서초구로 이전하게 되었다
그후 경희궁 전체 부지는 우여곡절 끝에
1986년부터 공원으로 개방하였다

정부와 서울시는
1988년 경희궁 복원계획을 세우며
1987년 우선 정문인 흥화문을 복원하였다
다만 원 위치에 구세군회관이 있기 때문에
서쪽으로 100여m 이동하여 복원했다

1907년 헐리는 흥화문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비운의 흥화문
1915년에는 남측 담장으로 옮겨졌다가
1932년에는 박문사의 정문이 되었다

박문사

博文寺
박문사는
안중근에게 사살당한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이등박문을
추모하기 위해
장충동 언덕에 세운 일본계 불교 사찰이다

박문사 정문 흥화문 대신에 경춘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일제는
사찰이 자리잡은 언덕을
이등박문의 호를 따라 춘무산 春亩山으로
박문사는 이등박문 이름에서 따오고

박문사를 짓기위해
광화문의 석재와 경복궁 선원전과 부속 건물,
남별궁의 석고각 등을 가져와 썼으며,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을 떼어와
절의 정문으로 삼았다

그후 그 자리에
영빈관이 들어서고 신라호텔이 생기면서
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 복원 계획에 의해
겨우 경희궁으로 돌아왔다고 했더니
지금은 엉뚱한 곳에서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 정문 노릇을 하고 있다

일본의 만행도 참기 어렵지만
우리정부가 하는 짓거리도 참으로 가관이다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1991년에는 숭전전을,
자정전과 회랑은 1998년에,
태령전과 일곽은 2000년에 복원하였으며
2002년에 숭정전 주변부 복원을 완료하여
경희궁을 시민에게 공개했다.

그러나 무슨 연유인지
2004년 복원사업이 중단되었고
그리고 지지부진하다
2014년을 기점으로 재개한다고 발표했으나
그것은 오직 말뿐이었다

오늘날의 경희궁은
2004년 복원이 멈춘 당시 모습 그대로다
5대 궁궐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창호문이 찢겨져 있는 태령전
태령전

사적 제271호로 지정되었지만
궁궐로서의 기능을 잃고
경희궁공원으로 불리는 이 곳은
궁궐인가 아니면 공원인가?

거창하게 경희궁 복원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하나하나 전각들을 복원해나가다
1997년에는 궁 내전이 있던 자리에
뜬금없이
서울역사박물관을 지었다
얼마나 대단하고 중요한 박물관이기에
복원해야 할 궁 안에다가
전시 내용도 허접하기만 한 박물관을 세우나?

그 뿐만이 아니다
바로 옆으로는
높다란 경희궁의 아침이라는 아파트 단지가
왼쪽 오른쪽으로 가득 들어서고 있는걸 보니
당분간
더 이상의 복원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
아니
계획도 생각도 없어보인다


어쩌면 시작부터 빗나갔지도 모른다
흥화문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구세군회관 빌딩이 있는 곳이었으나
형편이 여의치않다고
전혀 엉뚱한
지금의 위치로 이전, 복원되었다

게다가 본래는 동향이었던 흥화문이
지금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문이 되었다

그것은 사정이 그러니 그렇다고 해도
흉물스런 박물관 건물은 해도 너무했다
넖디넓은 서울에 그렇게도 세울 곳이 없어서
전각을 복원한다는 궁궐 안 터에다
무슨 대못을 쾅쾅 박듯이
그것도 가건물로 보이는 거지같은 건물을
지어놓는다 말인가?

현재 궁터에는
주변의 조경이 적잖이 변모되고
지하 방공시설이 구축되는 등 변화가 있었으나

용비천(龍飛泉)이라는 샘터가 남아 있고,
숭정전 등 주요 전각의 기단이 그대로 있는 등
전체적으로 궁궐의 지형이 잘 남아 있으며,
뒤쪽에는 울창한 수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아직도 궁궐의 자취를 상당히 간직하고 있다

경복궁도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며
폐허 상태였으나
지속적인 중건과 복원을 거치며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6.25후 근정정과 경회루만 남은 경복궁의 모습

실제 조선시대 말까지
경희궁 담벼락과 돈의문은 50m 내
지척 거리에 있었다

하루빨리 흉물스런 서울역사박물관을 허물고
우리의 기억에서 아득히 멀어져만 가는
돈의문을 되살리면서
인왕산의 서기가 가득한 경희궁을 복원하는
그 날이 오기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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