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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용산 미군기지

by 창밖의 남자 2020. 12. 22.

주한미군 용산기지로 불리웠던 곳
중국으로 시작하여 일본 그리고 미국
한반도 주변의 강국들이 차지해왔던
용산
그곳이 돌아왔다
138년 만에 외세로부터 반환되는 셈이다.

정부는 12월 11일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합동위 회의에서
11개 미군기지와 용산기지 2개 구역 등  
12개 기지를 반환받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반환되는 서울 지역 내 장소는
중구의 극동공병단
용산구의 캠프 킴/ 니블로배럭스/ 서빙고부지
8군 종교휴양소/ 용산기지 2개 구역 등 6곳이며

서울 밖 지역 중 반환되는장소는
대구 남구 캠프 워커 헬기장,
경기 하남시 성남골프장,
경기 의정부시 캠프 잭슨,
경기 동두천시 캠프 모빌 일부,
경북 포항시 해병포항파견대,
강원 태백시 필승 사격장 일부 등 6곳이다

龍山
서울의 남산에서 한강에 이르는 지역으로
인왕산에서 시작된 구불구불한 능선이
한강 가까이에서 봉우리를 형성하자
용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용산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용산은
오랜 세월동안
외국 군대의 단골 주둔지였다. 
13세기 말에는
고려를 침략한 원나라의 병참기지로,
임진왜란 중에는 왜군의 보급기지로 사용됐다

용산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882년부터다.
임오군란 직후 조선 정부를 장악한 청나라
원세개 袁世凱 위안스카이의 군대가
용산기지 북부(현 캠프 코이너)에
지휘소를 세웠다.

이후 청일전쟁 발발 뒤인 1894년
일본군 8000여명이 상륙해
용산을
조선 진출의 전초 기지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청일 ·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일제강점기 직전인 1908년
훗날 제2대 조선 총독이 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용산구 일대에 조선군 사령부 본부를 설치했다
일본 육군 20사단 사령부 및 예하부대,
조선 주둔 해군 사령부도 이곳에 주둔했다

1930년대의 지도를 보면
현재의 용산고등학교 일대에
78연대/79연대/포병대 주둔지가 있었고 
경리단길에는 사격장이 있었다. 
동부이촌동에는 기병대가, 
서빙고동에는 공병대가 주둔했다

군사기지만이 아니었다
용산 지역에는
조선 총독 관저도 용산에 세웠으며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가 진행되던 
1889~1918년에
일본 대륙 진출의 발판인 철도가 건설되고
이후 1945년까지 대륙 침략을 위한
일제의 동원 기지 구실을 했다
1938년부터는 강제 동원되는
조선 청년의 입영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광복 뒤에는
용산에 미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1945년 9월 미 극동군사령부가
오키나와 주둔 제24군단 예하 7사단 병력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면서
미군의 용산 주둔이 시작됐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한국군이 1년여간 용산에 주둔하긴했지만 
1950년 6·25전쟁 발발로
용산에 다시 미군이 들어왔다.

전쟁 기간 동안
미군이 용산 기지 재건을 시도하자 
1952년 정부가 용산을 미군에 공여했고,
정전협정 직후인 1953년 9월
미 8군사령부가 용산으로 이전했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로
미군 주둔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면서
일본 동경에 있던 유엔군사령부가 
1957년 용산으로 옮겨왔고,
그 해 주한미군사령부도 창설돼
용산에 자리잡았다.

백년도 넘게 외세가 주둔해 오던
용산땅이
우리품으로 돌아왔지만
문제점은 남아있다

서민들이 살 수 있는 아파트를 지어야 한다느니
여기저기서 이런 저런 박물관을 만들자는 등
요구하는 목소리도 많지만
바로 환경오염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용산은 100년 이상 군대가 주둔한 땅이였기에
유류, 중금속 오염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눈앞의 곳감만 빼먹을 생각만 하지말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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