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이야기

歲寒 세한

by 창밖의 남자 2020. 12. 9.




歲寒圖
세한도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고등학교 다닐 때 고3 국어 교과서에서
조그만 그림으로 처음 보았다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겠구나


세한(歲寒)은 설 전후의 혹독한 추위를 이르며,
인생의 시련과 고난을 뜻한다.

국어교과서에서 만난​
이병주 선생의 《古人과의 대화》
물이 흘러가듯 유려한 한글 문장이지만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 고졸스런 한자 단어가
지적 호기심을 확산시키며 읽혀지는
멋진 글이다
안광이 지배를 철한다는 문구 등으로 유명한​
양주동 선생의 《면학의 서》와 함께
지금도 잊지 못하는
명수필의 진한 여운이었다




....
중턱이 부러진 노송의 정정(亭亭)은
그믐달의 광채 그대로다.
앙상하게 드리워진 한 가지는
아직 예전의 창창(蒼蒼)을 과(誇)하고도 남는
기세요
거기에 어울려 그려진 세 그루의 소나무,
안마당에 서 있는 한 그루는
시봉(侍奉)의 구실을 도맡은 듯 자못 의젓하고
바깥의 두 그루도
주위 환경에 아랑곳없이 당당하다
하늘과 땅이 백설로 한 빛이건만,
싱싱한 솔잎에는 절조가 드높다
맞추어 세상을 잊은 토담집
인기척조차 감감한 그 지붕위에는
눈이 하얗다
이 모두가 완당의 강직한 삶이요
그의 오롯한 으름장이다
읽을수록 격조 높은 고졸(古拙)의 울림장이라
사뭇 옷깃을 여미게 한다.....



《훈민정음 해례본》 다음으로
우리나라 문화재 가운데 두번째로
너무나 유명한
《세한도》

지난 2006년 이후 전시된 이후
무려 14년만에
일반에게 다시 공개되고 있다
그것도
14.695미터의 길이로!

70.4㎝, 세로 23.9㎝의 크기이지만
중국(16명)과 한국(4명)의
문인 문사들의 감상평까지 치면
전체길이가 15m에 달한다.
이번 특별전에서 다 펼쳐보인다.




얼마 전에 손창근 선생이
세한도를 포함한
305점의 [손세기°손창근] 컬렉션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고,
이를 기념해 전시회가 열린 것이다.



솔직히
세한도는
그림으로만 치면
결코 잘 그린 작품이라 할 수 없다.
아닌게 아니라
창 문 하나만 나있는 허름한 집 한채에
나무 네 그루,
그리고 ‘세한도’라는 그림 제목과
제자 이상적에게 준다는 글씨 몇 자,
그리고 인장 몇 방,
그것이 전부다.


도대체
나무를 감상하라는 건지,
집을 구경하라는 건지 난감하네~~~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겠구나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

그대(이상적)이야 말로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않는
소나무와 잣나무가
아니겠는가


 


추사는 늘
“글씨나 그림을 그릴 때 반드시
문자향(文字香·문자의 향기)과
서권기(書卷氣·책의 기운)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연구자들은 바로 이 ‘세한도’에
추사의 ‘문자향 서권기’가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입을 모은다
사람의 눈이 간사해서
연구자들의 설명을 듣고 ‘세한도’를 보면
느낌이 달라진다.



건조하고 황량한 《歲寒》을
그림에 녹여내기 위해
물기 없는 마른 붓에 진한 먹물을 묻혀 사용한
필법은
그가 오랜 시간 갈고 닦은 필력에서 나온
결과이다




국보 중 국보로 손꼽히는
《세한도》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요소가 더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중국(16명)과 한국(4명)의 문사 20명의 감상평,
즉 긴 댓글이다.

문인 · 서예가이자 추사의 제자이기도 한
이상적은
스승이 그려준 이 ‘세한도’를
청나라 지인들에게
보여주고 자랑하고 싶어 안달했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감상평을 받아 함께 장황(표구)한 뒤
스승(추사)에게 보여줄 꿈에 부풀었다.

이상적은 마침내 1844년(헌종 10년) 가을
동지사(주로 동지 무렵에 보낸 사절단)
이정응 일행을 수행하여 연경에 갈 때
이 그림을 가져갔다.
이듬해(1845년) 1월 13일
이상적은 중국인 벗인 [오찬]의 초대연에서
이 그림을 중국 문인·학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추사 연구자인 박철상 소장은
“연회에 참석한
오찬, 장요손, 장악진, 조진조, 반증위,
풍계분, 조무견 등 13명과,
나중에 댓글 대열에 합류한 3명 등
모두 16명이 시와 문으로 감상글을 남겼다”고
설명했다.

이것이
《세한도》에 붙어있는
<청유 십육가>의 제찬이다


김군(김정희)의 바다 밖의 뛰어난 영재,
일찍부터 그 명성 자자했네.
명성은 훼손되어 갈 곳도 없고 세상의 그물 속에
걸려버렸네 도도하게 흘러가는 세속을 보니
선비의 맑은 정신 누가 알리오?
(반증위)

《세한도》는
이상적 → 김병선(이상적의 제자) →
김준학(김병선의 아들)로
소유자가 바뀌었는데,

세번째 소유자가 된 김준학은
1914년 1월과 2월
앞부분과 청나라 문인의 글(시)의 중간중간에
글과 시 등을 써놓으면서
자신이 세한도의 소장자임을 분명히 드러냈다

이상적의 제자인 김병선과
그의 아들인 김준학에게 넘어갔던
‘세한도’는
휘문고 설립자인 민영휘 등을 거쳐
일본인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의 손에 넘어갔다.
이때 저명한 서예가이자 서화수집가인
손재형이
공습이 한창이던 일본 도쿄의
후지츠카 자택을 찾아갔다.
병석에 누워있던 후지츠카는
“원하는대로 다 드리겠다”는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나 손재형은 포기하지 않고
두 달 동안이나 문안인사를 드리며
“제발 ‘세한도’를 넘겨달라”고 호소했다.
결국 후지츠카는
손재형의 끈질긴 간청에 감복하여
단 한 푼도 받지 않고,
그저 ‘잘 보존만 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세한도’를 넘겨줬다.

그런데 손재형이 ‘세한도’를 가져온 뒤
석달 만인 1945년 3월
후지츠카의 서재가 공습을 맞아 소실됐다.
손재형이 아니었다면
서재에 관리되었던 ‘세한도’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이후 1949년 소유자가 된 손재형이
오세창과 이시영,
그리고 정인보의 발문(댓글)을 받았다

소전 손재형 선생은
정치에 투신해 재산을 탕진하자
고리대금업자에게 세한도를 담보로 맡겼는데
돈 갚을 길이 없자
세한도의 소유권을 포기했다.
그래서 이 작품을
개성 출신의 갑부 손세기가 사들이고
그의 아들인 손창근이 소유하고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세한도》에는
오세창 · 이시영 선생의 감상글 뒤에
191㎝ 정도의 여백이,
또 맨 마지막 정인보 선생의 글 다음에
304㎝의 공백이 남아있다.



오세창·이시영 선생과 정인보 선생 사이의
공백(191㎝)은
당대의 문사들에게 글을 받으려 했다가
미완성인 채로 남겼을 가능성이 짙다
마지막 정인보 선생의 뒤 여백(304㎝)은
후대 문사들을 위해 남겨놓은
●댓글 공간●일 것이다.




오른쪽에
“완당선생초상阮堂先生肖像“
”소치허련사본小癡許鍊寫本“
오세창이 쓴 발문이 있다.


오사모를 쓰고 담홍포를 입은
김정희의 반신상이다
수제자인 소치 허련이 그린 초상이다
미소를 띤 온화한 표정을 통해
평생 김정희를 스승으로 섬긴 제자의 존경심을
엿볼 수 있다

근대 서화가인 오세창은
전서체로 《완당선생초상》이라 쓰고
그림의 작자가 허련임을 밝혔다



한겨울이 지나면 따스한 봄이 오는게
자연의 이치듯이

오늘의
우리네에게도
봄이 오기를 기다린다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신사리와 성배  (2) 2020.12.25
용산 미군기지  (3) 2020.12.22
가을의 끝  (5) 2020.11.29
청와대 뒷산  (3) 2020.11.15
봉은사에서  (2) 2020.11.1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