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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봉은사에서

by 창밖의 남자 2020. 11. 13.




강남구 한복판 금싸라기 땅에
꽃과 숲이 가득한
절집이 있다
봉은사


봉은사에 왔다
왜?
대입 수능이 코 앞이라
부처님을 뵙고 기도하러 오는 사람도 많지만
이것저것 볼 것도 많은 곳이
절집이다



목이 타고
갈증이 날 때
뭔가 초조하고
마음이 조급해지며
불안한 생각이 가득할 때
시원한 감로수 한 잔을 쭈~~욱 들이키면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지난 봄 홍매가 가득 피었을 때도
보지 못했던
낯선 일주문이 우뚝 서있다
새로 지었나?
하지만 그냥 쓱 보아도 제법 연식이 되었다



1986년 사찰 불사과정에서
봉은사를 떠나 양평 사나사를 거쳐
양주 석굴암으로 옮겨져 불이문 역할을 하다가
쫒겨난 지 33년만에
2020년 초여름날
일주문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불이문 / 양주 석굴암


이사난 전세난은 우리 인간만 겪는게 아니네
절집의 건물들도 이리저리 옮겨다니는구나


 


영동대교를 건너 경기고등학교가 지나려면
자그마한 고개를 넘어야 한다
지금은 많이 깎아 나즈막한 언덕에 불과하지만
한때는 숲도 울창한 큰 고개였다
修道山
수도산이다
경기고등학교의 뒷산이며
봉은사의 뒷산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이곳을 한티라 불렀다
큰 고개 / 높은 재
별 볼일 없던 그저그런 동네였는데
월세가 싸서 그랬나
언제부터인가 학원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그 유명한 강남 8학군이 된 곳
대치동
한자로 바꾸면 大峙洞
한글로 바꾸면 한티! 한재!
산이 많은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흔해빠진 이름이다

峙 : 산 우뚝할 치



이 뭣고?
범종 위에다
누군가 재미있는 낙서를 했다
아침 저녁으로 종을 치는 줄 알았는데
시끄럽다는 민원이 들어왔나?
종소리는 들리지않고
범종에 오랜 먼지만 캐캐로 쌓여있네


백남준 데드 마스크 석상 조형물

아니
진짜로
절집에
이게 뭣고?


[ TV부처 ] [ 파란부처 ] [ 테크니컬 부처 ]등
많은 불교 관련 작품을 만든 백남준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를 따라
자주 절에 다녔으며,
봉은사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2007년부터 매년 1월 기일에
추모재를 열고 있는
봉은사
그 곳의 법왕루는
뉴욕의 백남준 스튜디오,
독일 베를린 구겐하임미술관 분관과 함께
고인의 유해가 안치된 곳이라고 한다


眞如門 / 청남 오제봉 글씨


眞如
진여는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뜻하며,
평등하고 차별이 없는 절대의 진리를 이른다

그러므로
진여문에 들어선다는 것은
곧 진리를 찾아간다는 의미가 있다


禪宗甲刹 大道場 선종갑찰 대도량


道場
길 도 마당 장
도장은 무술을 연마하는 곳이지만

불교에서는
도량이라고 읽으며
도를 닦고 수행하는 곳으로
절이나 승려들이 모인 장소를 말한다

선종갑찰!
선종의 으뜸가는 절이란다
大道場이라 쓰고 대도량이라 읽는다

김옥균 유길준 등에게 개화사상을 가르친
역관이자 금석학자인 오경석의 아들로 태어나
3.1운동 때 민족대표였던
위창 오세창

독립운동가 언론인 서예가이며
한국서화가에 관한 기록을 총정리한 사전
근역서화징을 편술한 위창 선생이
전서로 현판을 쓰셨다.

현판의 불기 2970은
북방불기로 표시한 것이기에
서기 1943년을 뜻한다



1856년 9월,
불경을 보관하는 전각 판전이 완공되자
완당이
생애 마지막 불꽃으로 피워올린 글씨가
板殿
두 글자이다.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썼다는 말이 전해진다.



편액 왼쪽의 낙관에
《七十一果病中作 》
(일흔 한 살의 과가 병중에 쓰다) 라고 했는데,
여기의 ●과(果)는
그가 노년에 과천에 살면서 사용했던 호인
과도인(果道人) · 과노(果老) · 노과(老果)
등에서 나온 것이다.




대웅전의 현판도
추사 글씨로 알려져 있다
<판전板殿> 현판에서의 전殿자와
대웅전 현판의 전(殿)자가
인쇄라도 한 듯 일치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추사의 친필 편액이 아니라
진관사 대웅전 글씨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연인지는 모르겠으나
봉은사가
언제부턴가 진관사 현판을 모각해
대웅전 현판으로 걸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우리 마음 속에 아직도 살아있는 분
법정 스님
그 분의 수필집에서 언급되는 다래헌이
이곳 봉은사다

스님은
주로 해인사와 서울을 오가며
경전 번역과 관련된 일을 했고,
차츰 <대한불교>에 원고를 쓰기 시작하면서
총무원이 있던 조계사와 동국대학교를 오갔다
1964년 동국역경원이 설립되면서
한강 건너 봉은사의 한 켠 전각을 얻어
다래헌(茶來軒)으로 이름을 지어 머물며
1975년 송광사 불일암으로 내려가기 전까지
서울살이를 했다.




판전 아래
단칸짜리 작은 비각 안에 있는
興宣大院位永世不忘碑
흥선대원위영세불망비

비문은 모두 예서체로
품위 있는 아름다움이 은은하다.

봉은사의 땅이
남의 농토에 뒤섞여 여러 해 송사에 시달렸는데
흥선대원군 덕택에 해결되어
그 은혜를 돌에 새겨 영구히 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비는 고종 7년(1870)에 세웠다고 하였으나
아쉽게도 글씨를 누가 썼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문을 들어서면서
자신의 욕망과 집착을 모두 벗어놓는다는
하심문
마음 심 心자가 가로 누웠다


연회루


새로 문을 연 연회다원은
봉은사 창건주인 연회국사의 법호인 연회를 딴
전통차체험관으로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불교 문화와 차 문화를 알리고자 건립됐었으며
차를 내리는 과정부터 마시는 법을
배우고 직접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찬찬히 둘러보면
볼 것 많은 게 절집이고
이 곳 봉은사는 특히 더 많다
다음에 또와서 찬찬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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