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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나는 안중근이다

by 창밖의 남자 2020. 10. 23.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 30분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이 
중국 하얼빈에서
이등박문 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은
20세기초 일어난 최대의 사건이었다

여순 법정 공판

당시 안중근 나이 31세
거사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 이등박문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 대한의군 참모중장 大韓義軍 參謀中將
신분과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민간인 개인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다
라고 분명히 밝혔다.

​안중근 의사??
그는 민간인도 개인도 아니기에
의사라고 열사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호칭이라 판단된다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난다

국가보훈처 정의를 따르면

의사(義士)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항거하다가
의롭게 죽은 사람으로
무력으로 싸우다 죽은 사람을 가리킬 때 쓰며,
군인에게는 쓰지 않는다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열사(烈士)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의롭게 죽은 사람으로
맨몸으로써 저항하여
자신의 지조를 나타내는 사람
이준 열사 / 유관순 열사/ 민영환 열사

지사(志士)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투쟁하신 분
애국지사 : 김구  김원봉 

동아일보 1987년 8월 27일자, 횡설수설
.....
《열사》와 《의사》를
어떻게 구분하느냐는 기준은
10여 년 전 원호처의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서
독립 운동사 편찬을 앞두고
항일 선열들의 공적을 조사할 때 정해졌는데

직접 행동은 안 했어도 죽음으로
정신적인 저항의 위대성을 보인 분들은
'열사'라고 하고,
주로 무력으로 행동을 통해서
큰 공적을 세운 분들을 '의사'라고 하기로 했다..

안중근은
대한제국 의군 참모중장이다
의사도 열사도 아닌
군인이다

암살도 아니고 테러도 아니다
군인으로서
이등박문을 사살한 것이다

◇ ....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을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 순국 직전 남긴 마지막 유언에서


●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 조마리아,
안중근 어머니

​안중근 어머니,
조성녀
조마리아는 안태훈과의 사이에 안중근(1879~1910)
안성녀(1881~1954)
안정근(1884~1949)
안공근(1889~1939) 등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장남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고,

차남 안정근은
북만주에 난립한 독립군단을 통합시켜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삼남 안공근은
백범 김구의 한인애국단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윤봉길과 이봉창의 항일의거를 성사시켰고

딸 안성녀는
안중근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손수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었다.

조마리아는
자식들을 모두 독립운동의 제단에 바친
장한 어머니였다.

조마리아는
감옥에 갇힌 아들
안중근을 면회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당차고 의기로운 어머니였지만,
죽음을 앞둔 아들을
차마 만나볼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순감옥으로 형을 면회하러 가는
아들들에게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는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고 한다.​​


조마리아는
가족들과 함께 상하이로 이주하여,
임정의 김구, 이강, 김붕준 등
독립운동가 가족들 20여명과 함께 살았다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창립하고,
위원으로서 임시정부 후원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조마리아는
여중군자(女中君子) 여걸(女傑)’이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로 신망이 높았다.

상해에서 조마리아와 함께 생활한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는
조마리아에 대해
“너그러우면서도 대의에 밝은 분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이는 조마리아가
안중근 유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김구의 모친 곽낙원과 함께
상해 독립운동진영의
안주인이자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후기》

● 안준생
: 안중근의 차남
1907년 생으로
중국에서 머물다 상하이에서 사업을 했다
이때부터 친일파로 변절했다.
1939년 10월 7일
만선시찰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하였고 
이등박문 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의 위패를 봉안한
박문사 博文寺
신라호텔 자리에 있었던 일제의 사찰에서
자신의 아버지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것을 사죄하였다.
또한 10월 16일 조선호텔에서
이토의 차남 이토 분키치 伊藤文吉
(이토가 집안의 하녀를 통해 낳은 아들)를 만났으며
이때 그에게 사죄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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