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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남한산성에서

by 창밖의 남자 2020. 5. 17.

 

 

1636년 12월 16일부터
그 이듬해인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 동안
싸우자는 김상헌과
화친하자는 최명길의 팽팽한 대결을 그린 영화
남한산성

 

조선일보 자료사진

 

누구도 함락시킬 수 없는
하늘이 내린 요새라고 자랑한  남한산성에는
어처구니없게도 식량이 없었다. 
눈 쌓인 겨울 산에는 머루도 달래도 없다. 
굶으면서 며칠이나 싸울 수 있을까? 
군사들은 이미 전투에 필요한 말까지 잡아먹었다.
조정대신들이 뜨겁지만 허황된 논쟁을 벌일 때
싸움을 담당하는 군사들은 하염없이 굶고 있었다. 

 

잠실 석촌호수 쪽에 있는 삼전도비

 

원래의 비명은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이다.
이조판서 이경석이 글을 짓고, 글씨는 오준,
비명(碑名)은 여이징(呂爾徵)이 썼다.

 

 

먹을 것이 없는데 무슨 싸움?
청나라는 밖에서 느긋하게 즐기고 있었다.
성을 포위하고 기다리기만 하면 끝나는 전쟁이었다
싸우는냐 화친하느냐 하는 논쟁은
물정모르는 조정 대신들의 공염불일 뿐이다

 

 

싸움이냐 화친이냐가 아니라
굶어죽느냐
항복해서 식량을 얻느냐하는 상황이었다

 

 

도올 김용옥은 이렇게 말했다
.....
척화는 선이고 주화는 악이라는
윤리적 2원론은 역사를 보는 잣대가 될 수 없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우리나라 역사 전체를 파악하는 안목이 부족했으며 주자학의 도통관념에 사로잡혀 화이지분(華夷之分)으로 역사의 실상을 보지 않았다. 
때는 이미 숭명(崇明)의 시대가 아니였다.
최명길의 입장은 상식일 뿐이다.
중요한 사실은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자기들과 같은 뿌리의
고구려 - 발해 대제국의 정통후예로서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용옥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
그들과는 얼마든지 영예로운 협상이 가능했고,
삼전도의 치욕을 면할 수 있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조선의 정벌이 아니라,
중원의 정벌을 앞두고
후방의 교란을 원치 않았을 뿐이다.
재빨리 외교적 협상에 응하여 정당한 전략을 폈으면 호란자체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역사에는 진보와 보수, 좌와 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상식과 몰상식만 있다.
싸워 이길 수 있는 군대와 식량이 있으면
싸우는 것이 상식이요,
싸울 수 있는 아무런 기력이 없으면
화해하는 것이 상식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남한산성은 어떻게 다가올까?

그곳에 가면,
닭집도 많고 한정식집도 많고
족구도 하고 등산도 하며
그러면서도 뭔가 유래도 있어보이는
밥 먹기 좋은 유원지라고 생각한다.
사실이 그렇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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