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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미수 허목

by 창밖의 남자 2020. 6. 3.


우리는
국사 교과서에서 역사를 배우고
고궁과 유적지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끼며
TV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역사적 사건을 마주하고 역사의 인물을 만난다


미수 허목
늦은 나이에 정계에 등장했지만
흰 수염을 휘날리며
자신의 소신과 원칙을 지킨 학자 허목
지방관으로서 삼척 주민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자신의 소임을 다하신 분
우리의 역사에서 다소 소홀하게 평가받고 있다고
여겨지는 분이다


眉 눈썹 미 叟 늙은이 수
눈을 덮을 정도로 눈썹이 길었기에
스스로 자신의 호를 미수라 이름지었다

국립춘천박물관 소장. 보물 제 1509호

오사모에
담홍색의 시복(時服)을 입고
서대(犀帶)를 착용한
좌안 7분면의 복부까지 오는 반신상이다.
영정의 오른 쪽에는
채제공이 당시에 쓴 표제가 붙어 있다.

화폭 상부의 제발문에 따르면,
정조 18년(1794) 정조가
허목의 인물됨에 크게 감동하여
그 칠분소진(七分小眞)을 얻고자
채제공으로 하여금 사람들과 의논하도록 하였으며
은거당(恩居堂, 1678년 숙종이 하사한 집)에서
선생의 82세진을 모셔다가
모사(模寫)한 것이라고 한다

이 초상은
생시 진상은 아니지만 
노학자의 문기어린 풍모를 잘 전달해 낸
당대 최고의 어진화사(御眞畵師) 이명기의
솜씨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조선 중기
미수 허목과 우암 송시열은
각기 남인과 서인을 대표하는 이론가였다.

이른바 그 유명한 예송(禮訟) 논쟁.
현종대에 효종과 효종비가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이던
자의대비(장렬왕후, 조대비)의 복상 기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떠올랐다. 

1차 기해예송(己亥禮訟)과
2차 갑인예송(甲寅禮訟)의 두 차례에 걸쳐
남인과 서인 간에 격렬한 논쟁과
그 결과에 따른
참혹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는데,
그들 우두머리가 허목과 송시열이다.
그야말로 역사속의 대표적인 라이벌이었다.


그런 와중에
송시열이 중병에 걸렸을 때
허목의 약 처방을 받은 일화 또한 유명하다.

光風霽月의 光 빛 광


허목은 의술에 정통하여
당대의 유의(儒醫)로 이름 높았고,
당시 백약이 무효했던 송시열은
그에게 가서 약방문을 받아오도록 아들을 보냈다
송시열의 아들은
마지못해 허목을 찾아가 약방문을 받아왔는데
그 처방을 보니 비상이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光風霽月의 風 바람 풍


“그것 보십시오, 아버님!
허목이
아버님을 해할 목적으로 비상을 넣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 약방문은 없던 일로 하십시오.”
주변에서는 모두 의심하며 말렸지만
송시열은 그대로 약을 달여 먹었고, 곧 완쾌되었다

光風霽月의 霽  갤 제


허목은, 처방전을 쓰면서
송시열의 병은 이 약을 써야만 나을 텐데
비상까지 섞인 자신의 약방문을 믿지 않을 테니
결국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光風霽月의 月 달 월


그러나 송시열은,
허목이 정적이기는 하나
적의 병을 이용하여 약으로 해칠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송시열이 완쾌하자
허목은 무릎을 치며 그의 대담성을 찬탄했고
송시열은 허목의 도량에 감탄했다

光風霽月

光風霽月
光 빛 광 / 風 바람 풍 / 霽  갤 제 / 月 달 월

비가 갠 뒤의 바람과 달처럼,
마음결이 명쾌하고 집착이 없으며
시원하고 깨끗한 인품을 형용한 말


이들 선비들은
서로가 서로를 내치는
비정한 권력투쟁의 정치 현실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알아주고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는
진정한 중도(中道)의 삶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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