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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백인제 가옥

by 창밖의 남자 2020. 7. 23.
전지현이 나왔던 영화 [암살] 촬영지로 널리 알려졌다



김광규 시인의
[묘비명]이라는 시가 있다.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꿋꿋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 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북촌 가회동에 위치한 백인제 가옥은
근대 한옥의 양식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대표적인 일제강점기 한옥이다.
우리들에게
그렇게 알려져 있고
그렇게 알리고 있다.

백인제가옥은
전통적인 한옥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근대적 변화를 수용하여,
건축 규모나 역사적 가치 면에서
윤보선 가옥과 함께 북촌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소개되고 있다.

인용문.....

1907년 경성박람회 때 서울에 처음 소개된
압록강 흑송(黑松)을 사용하여 지어진
백인제 가옥은
동시대의 전형적인 상류주택과 구별되는
여러 특징들을 갖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를 별동으로 구분한
다른 전통한옥들과는 달리
두 공간이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
문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또한 일본식 복도와 다다미방을 두거나
붉은 벽돌과 유리창을 많이 사용한 것은
건축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사랑채의 일부가 2층으로 건축되었는데,
이는 조선시대 전통한옥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백인제 가옥만의 특징이다.

정원에서는 당당한 사랑채를,
중정에서는 넉넉한 안채를,
그리고 후원에서는
아담한 별당채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백인제 가옥은
우리 한옥의 다양한 아름다움이 한 자리에 모인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백인제가옥 에서 인용

백인제 가옥은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가 살았던 집과는 많이 다르다.

겉으로는 예쁘게 생긴 한옥이라 여기지만
실제로는
일본집과 양옥집이 뒤섞인 집이지,
서울시에서 얘기하는 것같은
한옥의 다양한 아름다움이 나타난 집은
결코 아니다.



사랑채의 툇마루와 복도는 물론 사랑대청까지
모두 일본식 장마루를 적용한 점이 특징이다.

* 기둥 사이에 장선을 일정한 간격으로 걸고
그 위에 폭이 좁고 긴 마루널을 깔아 만든 마루

이 집을 지은 이는
백인제가 아니고
한상룡이다

한상룡은 대표적인 친일파 기업인으로서
일본 고위 인사들을 위한 연회를 염두에 두고
이 집, 이 건물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조선총독부 총독들을 비롯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의 권력가들은 물론
미국의 석유왕 록펠러 2세도
연회를 즐긴 것으로 알려졌다.
보통 한옥에서 찾기 어려운
2층 공간이 있다는 점도 특이한 대목이다.

전지현 나온 영화 암살의 한 장면 그대로
이곳에서 각종 모임과 파티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백인제 가문은
백병원을 설립 소유하고,
연세대 총장 백낙준 그리고
창작과비평사의 백낙청을 배출한  명문가다.

그러나 이집은 백인제 가옥이라기 보다는
대표적 친일파 기업인인 한상룡 가옥이다.
서울시의 불편한 진실이다.

단지, 1977 민속자료로 등재될 때 
백인제가 소유하고 있었다고 해서
백인제 가옥이라는 이름이 내걸었을 뿐이다.

나쁘게 말하면 역사의 기만이고
시민을 우롱하는 일이다.
왜 친일파집이라고 솔직하게 얘기를 안하는지?

이 집에 올 때마다
서울시의 얄팍한 속임수에 불쾌한 느낌이 든다

한상룡은 
한 마디로 말하면,
식민지 예속경제화의 첨병역할을 한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자본가다.

두 마디로 얘기하면,
친일파 이완용의 조카로서
경제 침탈에 빌붙어 돈을 엄청 번 인물이다.

한상룡은
일제침략기에서 식민지자본주의가 확립되기까지
40여년 동안 재계 실업계를 대표한
중심 인물이었다.
일본 재계는 식민 침략의 필요에서
그의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한상룡은
조선총독부 총독이나 조선군사령관 등의
<신임>을 바탕으로
서울과 동경을 오가면서
권력과 밀착한 정상배로서의 독보적 입지를
40여 년에 걸쳐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친일 예속성을 기반으로
한성은행을 경영하고
수많은 기업과 회사, 공장을 설립하였다.




만일에 친일이라는 <오명>을
그에게서 잠정적으로 거두어 들인다면
,
이 시기 가장 활발하게
근대화를 추진한 대표적인 인물로
우리에게 기억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모든 활동은
식민 지배체제를 강화함으로써
동족인 조선 민중을 수탈하고,
일제 자본의 지속적인 이익을 보장하며
제국주의 전쟁과 침략을 방조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에게 민족과 국가가 있다면
그것은 조선이 아니라
일본 민족이고 일본 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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