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이야기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

by 창밖의 남자 2021. 5. 1.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는 옛 말,
어리석은 사람 한 명이
주변의 다른 사람들까지 망신시킨다는 뜻인데
어릴 때도 그랬지만
지금까지도 이해가 안되는 속담이다
왜?
꼴뚜기가 어때서!

꼴뚜기는
서해와 남해에서 많이 잡히는데
오징어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크기가 훨씬 작은 6~7센티미터밖에 안 되어서
꼴뚜기 조림이나 꼴뚜기 젓갈로 만들어
먹을게 마땅치 않을 때 밑반찬으로 먹거나
싸줄게 변변치 않을 때 도시락 반찬에 들어갔다

생김새가 볼품없어서
별 볼일 없고 가치가 낮은 것에 비유해서
말했다는 것은 알겠지만

조림으로 먹고 젓갈로도 즐겨 먹으면서도,
오징어 보다 훨씬 자주 먹으면서도
오징어 보다 싸다고
오징어 보다 못생겼다고
그런 구박을 하다니?

아쉬울 때는 요긴하게 써 먹다가
배가 부르면 가차없이 버리고 조롱하는
인간의
가장 나쁜 본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속담이
바로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던 그 속담도
이제는
옛 말의 하나로 넘겨야 할 듯하다

꼴뚜기라는 생선이
요즘에는 가게에서 눈에 띄이지도 않고
온라인이 아니면 사는 것도 그리 쉽지가 않다

이제는 서른이 넘어버린 딸내미에게 물어보니
들어보기는 했지만
한 번도 보지도 못한 거라고 한다

또한 생선을 파는 곳을 뭐라고 부를까?
내가 주변에서 듣기로는
어물전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꼴뚜기도 어물전도
보지도 먹지도 듣지도 쓰지도 않는 말이 되었다

그렇다면
생선이나 미역 다시마 김 등을 파는 곳을
어물전이 아니면
요즈음에는 무어라 부를까?

언제부터인가 이름도 명칭도 많이도 생겼다
가게 생선가게 점방 전포 점빵
구멍가게 슈퍼 편의점 슈퍼마켓 마트 SSM
백화점 이마트 홈플러스 롯데마트 코스트코

가게는 
작은 규모의 장소에서 물건을 파는 집을 말한다
원래는
假家
가가, 임시로 지은 집에서 온 말이다.

왕이 행차하면 쉽게 허물 수 있도록 만든
가건물 상점이나 노점상을 가리켰다

큰 것은 <어물전> 처럼 <전 廛 >이라 하였고,
그 다음은 ‘점방’ 처럼 <방 房>이라 하였으며,
구멍가게 처럼 규모가 작은 것을
<가가 假家>라 하였는데
<가가>가 변음이 되어 <가게>가 되었다

구멍이라는 것이
쥐구멍이나 개구멍 같이 좁게 뚫린 것을 말하니
구멍가게란,
옹색하고 비좁은 작은가게를
과장되어 말하는 것이다

경상도나 전라도 출신 사람들이 잘쓰는 단어
점빵!

<점빵>은
<점방 店房> 또는 <전방 廛房>에서 나온 말로
두 단어를 소리 나는 대로 읽다 보니
<점빵>이 됐다고 한다

점방이나 전방 모두
물건을 파는 가게라는 뜻이다

廛 : 가게 전
店 : 가게 점

두 한자어는 모두 같은 의미이고
해가 갈수록 점점 쓰지않아 죽어가는 단어라는
공통점이 있다


전은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시설을 뜻하고
시전(市廛), 육의전(六矣廛)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시가지에 있는 큰 상점은
시전(市廛)이라 불리었다
옛날에는 가게 뜻으로 점(店)을 쓰지 않았다


점은 생산과 판매를 겸하는 시설을 뜻했다
금점(金店) 은점(銀店) 철점(鐵店)이라 하면
금광이나 은광 철광 등 광산을 나타내는 말이고
옹기점, 유기점, 자기점 등으로 쓰였다

따라서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市廛
시전은
상당한 구매 인구를 확보할 수 있는
서울, 평양, 개성 등의 대도시에만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하나의 상전이 하나의 물품만 취급하는
일물일전(一物一廛)의 원칙이었기 때문에
여러 상전이 모여 있는 시전가가 형성되어
일종의 '종합상가'의 역할을 수행하였는 바
시전의 대표가 바로
육의전이라 부르던 육주비전이다.

지금 종로네거리에 있는 보신각은
시간을 알리는 종을 설치했던 누각으로서

종각 / 종루가 있는 이 길을
조선시대에는 종길, 종로, 또는 종루가라 하고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거리>
라는 뜻에서
雲從街 운종가라 부르기도 했다

오늘 날의 종로2가 탑골공원 옆쪽에는
六注比廛 육주비전,
흔히 육의전이라 부른 터가 있다

시전에게 부과된
국역(國役)은
최고 10푼에서 최하 1푼(分)까지로,
모두 30전(廛)이 넘었는데,
이들을 유푼각전(有分各廛)이라 하였다.

이 가운데서
국역을 가장 많이 부담하는
시전 여섯을 추려서
육의전(六矣廛 : 六注比廛)이라 일컬었다

이곳에서는
나라로 부터 허가받은 사람이
허가받은 물품만을 팔 수 있었으며
허가를 받아 장사하는 상인을
市廛 시전 상인이라 했고

허가받지 않고 장사하는 상인을
亂廛 난전 상인 이라고 했다

이들은
국역을 지고
정부 물품을 조달하는 댓가로
도성 안과 도성 아래 십리 이내의 지역에서
난전의 활동을 규제하고,
특정 상품에 대한 전매권을 지킬 수 있는 특전,
禁亂廛權
금난전권을 받았다

육의전은
시대에 따라 다소 다르기는 했으나

중국산 비단을 취급하는 선전(縇廛)
국내산 무명을 취급하는 면포전(綿布廛)
명주를 파는 면주전(綿紬廛)
모시와 베를 파는 저포전(苧布廛)
종이를 파는 지전(紙廛)
건어물을 파는 내외어물전(內外魚物廛)을
들 수 있다

어물전은
한양 성안에는 내어물전이
서소문 밖에는 외어물전이 있었다

때문에 내어물전이나 외어물전도
국역 부담 능력에 따라
육의전에 속하기도 하고 제외되기도 했던
것이다

육의전 중 가장 가장 으뜸가는 상전이
선전(縇廛)이었다고 한다.

중국 비단을 수입해서 파는,
일종의 해외 명품브랜드를 수입해서
독점적으로 파는 명품 매장에 해당되었기에
출입하는 고객들도
당시 조선의 최고위층이었을 것이고,
이문도 그만큼 많이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후기 정조가 단행한 신해통공(辛亥通共)

1791년 정조는
난전을 통제하고 시전을 보호하는
기존 입장을 완전히 뒤집어
난전을 허용하는 신해통공 정책으로 선회했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채제공의 건의를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했다.

그는 상소에서
난전 상인들의 고충을 상세히 알렸고,
시전 상인들의 독과점으로 인한
가격 왜곡 현상도 지적하며
비단, 면포, 명주 등 청나라에 보내는
조공 물품 조달을 책임졌던 육의전을 제외하고
기존의 모든 단속을 폐지하자고 제안했다.

신해통공 정책 이후
조선 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난전 상인과 시전 상인의 경쟁이 시작되면서
상품의 질은 더욱 좋아졌다.
다양한 상업 구역이 형성되면서 백성들의
생필품 구입도 쉬워져 소비도 촉진됐다.
시장이 확대되자
새로운 세수를 확보해 재정을 늘릴 수 있었다
모두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간 것이다.

육의전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라져버렸다

지난 역사는
구태연하기도 하고
고리타분하기도 하다
이것저것 몰라도 사는데 크게 지장은 없다

하지만
무엇이 올바른 삶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지나가 버린 역사 속에서
무엇을 얻고 배워야 하는지
우리는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유도  (1) 2021.04.18
호림박물관  (3) 2021.04.05
모이지말라니까  (1) 2021.03.06
삼일절  (1) 2021.03.01
소쇄원에 가보니  (2) 2021.02.1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