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형영은
자신의 시집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 햇살이>에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 태어나고
사라지는 생명들과의 교감
그리고
가끔
거기서 얻은 감동을 시로 꽃피우는 즐거움,
그 은총이야 말해 무엇하리....
라고 말했다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고 산다.
내가 꽃인데
꽃을 찾아다니는가 하면,
내가 바람인데
한 발짝도 나를 떠나지 못하고
스스로 울안에 갇혀 산다.
내가 만물과 함께 주인인데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한평생도 모자란 듯 기웃거리다가
나를 바로 보지 못하고
나는 나를 떠나 떠돌아다닌다.
내가 나무이고
내가 꽃이고
내가 향기인데
끝내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고
헛것을 따라다니다
그만 헛것이 되어 떠돌아다닌다.
나 없는 내가 되어 떠돌아다닌다.
「헛것을 따라다니다」
진달래 꽃눈 맞추며
산에 오르다 둘러보니
봄날이 벌써 앞서가더라
「화살시편 26 ― 봄날」
헛것에 홀려
떠돌다
떠돌다 넘어져
돌아보니
아이쿠머니나,
천지 사방이 여기였구나
평생이 이 순간이구나
「화살시편 10 - 돌아보니」
어디로 떠난다 해도 거기 내가 머무나니
님은
나의 두려움 없는 자유라
「바람」
기다리는 님이 오지 않았기에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오지 않았기에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기다리는 님은 오지 않았기에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기다리는 님은 오지 않았기에
나는 님이 누군지 알 것만 같다.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내가 당신을 얼마나 꿈꾸었으면
당신은 말을 잃고 내게 오는가.
사랑이라는 말
죽음이라는 말
내가 당신을 얼마나 꿈꾸었으면
당신은 내가 부를 이름도 없이 내게 오는가.
보이지 않는 당신
보이지 않는 육체
그럼에도 당신은 살아 있다.
어둠 속 깊이깊이
내 마음속 깊이깊이
내가 당신을 꿈꾸는 것처럼
당신은 나를 꿈꾸고
우리는 우리만의 세계를 가지리.
사랑의 힘으로
죽음의 힘으로
다시는 깨어날 수 없는
시간의 힘으로
천국이 있다면
우리가 그 천국을 이루리.
「내가 당신을 얼마나 꿈꾸었으면」
정녕 나무는 내가 안은 게 아니라
나무가 나를 제 몸같이 안아주나니,
산에 오르다 숨이 차거든
나무에 기대어
나무와 함께
나무 안에서
나무와 하나 되어 쉬었다 가자.
「나무 안에서」
운명을 견뎌내느라
꿋꿋이 서 있는 너를 볼 때마다
내 팔다리는 가늘어지고
내 생각은 너무 가벼워
몸 둘 바를 모르겠기에
나는 때때로 네 앞에서 서성거린다.
너를 끌어안고서
네 안으로 들어가려고,
너를 통해서
온전히 네가 되어보려고.
「나무를 위한 송가」
술 한잔 마시고,
많이는 아니고
조금, 마시고
취해서
비틀거리니
행복하구나.
갈 길 몰라도
행복하구나.
「조금 취해서」
아직도 모르겠다
태어난 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그걸 사람에게 물어보라고?
「화살시편 21 ― 모르겠다」
머지않아 닥칠지 몰라.
봄이 왔는데도 꽃은 피지 않고
새들은 목이 아프다며
지구 밖으로 날아갈지 몰라.
강에는 썩은 물이 흐르고
물고기들은 누워서 떠다닐지 몰라.
나무는 선 채로 말라 죽어
지구에는 죽은 것들이 판을 치고,
이러다간
이러다간
봄은 영영 입을 다물지 몰라.
생명은 죽어서 태어나고
지구는 죽은 것들로 가득할지 몰라.
그래도 봄을 믿어봐.
「그래도 봄을 믿어봐」
정말 못 당하겠네
밤을 낮이라 하고
낮을 밤이라 우기는 놈들
올빼미 너냐?
아니면
너 말고
또
누구냐?
나냐?
「올빼미」
계획 없이 살아도
편안한 나이가 된 것 같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 태어나고 사라지는 생명들과의 교감
그리고
가끔 거기서 얻은 감동을 시로 꽃피우는 즐거움,
그 은총이야 말해 무엇하리.
돌아보면 제멋에 취해 덤벙대던
젊은 날의 멋도
—좀 서툴긴 했어도—
그 나름대로 멋이 있었지만,
무언가에 매어 사는 것 또한
그 못지않다는 생각도 든다.
요즘 내가 그렇게
매인 듯 풀린 듯 계획 없이 살고 있다.
아, 복된 탓이여.
2021년 2월
김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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